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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조프스키가 들려준 음악 이야기
larayang I 2009-06-10 I 조회 2493
5월의 시작과 함께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들려주었던 음악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예술의 전당은 제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랍니다. 여느 때처럼 돌계단을 올라 콘서트 홀로 가던 도중 잠시 오페라 하우스 곁에 멈춰서서 음악 분수의 춤을 감상했지요. 주위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눈에 보이는 모든 장면이 오늘 준비된 이 공연의 전주곡처럼 느껴졌습니다.

거금을 들여 처음으로 C블럭 6열에 앉았는데 건반이 제 눈높이에 놓여 있더군요. 오른손 밖에 보지 못할거라 생각하니 좀 안타까웠어요. 잠시 후 무대 뒤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커다란 두 장정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상대적으로 마른 편인 사람은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고, 또 한 사람은 지휘대에 올라섰죠. 피아니스트의 고갯짓을 신호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시작되었습니다.

드미트리 야블론스키의 지휘 아래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음악의 돛을 화려하게 펼쳤습니다. 1분이 넘도록 조용히 침묵으로 일관하던 피아노가 드디어 음표의 파도를 타고 등장. 음악이 고조되자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에너지를 끌어안은 사람처럼 보리스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었습니다. 그러다 첫 번째 클라이맥스의 마지막 음을 치기 직전,

티잉!

그의 초절기교 연습곡 영상물을 보던 중에도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습니다. 보리스는 스타인웨이 위로 몸을 숙이고 끊어진 현을 돌려 걷어내고는 '문제 없으니 계속 연주하죠.'하고 말하듯 지휘자에게 손을 흔들어보였어요.

이 협주곡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아름다운 피아노 솔로로 시작하는 2악장의 도입부입니다. 피아노의 높은 음이 까만 밤하늘에서 깜박이는 별처럼 섬세하고 우아하게 반짝거리지요.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청중들조차 숨을 죽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게 속삭이는 보리스의 피아니시모는 실로 매혹적이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연주자들은 제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고도의 집중력과 음악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현악과 목관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다 이내 한 자리에서 만나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는 오케스트라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합니다. 극심한 우울증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작곡가의 승리를 연상시키는 마지막 부분에선 눈물과 웃음을 함께 느낄 수 있었지요.

지금까지 전 라흐마니노프의 피협 2번을 그리 즐겨듣지 않았습니다.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된 리흐테르의 녹음이 뛰어난 연주라는 의견에는 십분 공감했지만 그 감동적인 음반을 듣고서도 이 곡에 애착을 갖기는 힘들었어요. 그런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를 일이네요. 이 공연에서 실황으로 듣고 완전히 빠져들어버렸거든요.

중간 휴식시간이 지나자 마음은 오늘의 마지막 곡에 대한 기대감으로, 머리는 연주자들의 체력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찼습니다. 긴 협주곡을 벌써 두 작품이나 연주한데다, 이제 거대한 산(브람스의 두 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넘어야하니까요. 게다가 이 곡은 빠른 템포의 아르페지오 때문에 도입부에서부터 피아니스트에게 상당한 심적 부담감을 준다고 들은 기억이 있어서 말이지요.

지휘봉의 움직임과 함께 혼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래는 피아노의 소리를 빌어 더 풍부한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고 목관악기는 또 다른 선율로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피아노가 격렬한 카덴차를 쏟아내지요.  

희고 검은 건반을 훑어내리는 보리스를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며 속으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의 두 손은 절대 건반을 마구 두들겨대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에서도 그 동작은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유려하고 부드러울 뿐이었죠. 이에 대한 피아노의 반응 또한 놀라웠습니다.  

마침내 피날레에 다다른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음악을 향한 진실함과 애정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거든요. 분명 공연 내내 관객들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음악이 주는 선물을 즐기고 있었던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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